서평
민주주의가 꿀벌을 닮을 수 있을까?
꿀벌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신이 보낸 전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달콤함과 아름다움과 평화로움 속에 살아가는 신의 전령.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꿀벌의 집터 탐색이 이 작고 멋진 생명체에 대한 경이로움을 자아낸다고 믿는다. (p.277)
B.C. 1445년 경 이스라엘인들은 학대를 피해 이집트를 탈출한다. 새 정주지를 찾지 못하면 광야에서 죽는다. 가나안 땅을 찾는 여정에서 열두 명의 정찰대가 나섰고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그 땅의 정보를 동족에게 보고했다. 한 여왕벌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꿀벌 왕국에서 엑소더스는 늘 일어난다. 벌 무리가 커지면 권좌는 여왕의 딸이 차지하고, 따지고 보면 모두 여왕의 자녀(딸이 95%, 아들이 5%쯤이다.)인 백성들은 제 어미를 노골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한다. 여왕은 부당 탄핵을 당한 후 쫓겨난다. 제 백성의 2/3인 1만 마리쯤이 따른다. 다수가 소수에게, 어미 여왕벌이 그 딸인 여왕벌에게 쫓겨나는 기묘한 반란. 이것이 ‘분봉’이라 부르는 과정이다.
이 꿀벌의 난민 집단에게 새 집터는 금방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몇 킬로그램의 난민 덩어리로 머물며 수십 혹은 수백 마리의 정찰대를 급파한다. 정찰대의 목적은 최적의 새 집터 후보지 정탐.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정찰벌들은 8자 모양의 기묘한 엉덩이춤으로 그들이 탐색한 거리, 방향 등 다양한 집터 후보지의 정보를 다른 벌들에게 전달한다. 우수한 집터를 본 정찰대는 활발하고 적극적인 춤을 추고, 그저 그런 집터를 본 정찰대는 춤도 밋밋하다. 꿀벌의 신경체제는 모든 대안들을 비교 평가 후 더 좋아 보이는 대안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집터가 갖추어야 할 요소를 종합한 절대 평가를 내린다. 최적 후보지를 본 꿀벌은 더 열렬히 춤을 추어 동료 꿀벌들에게 광고한다. 춤의 강도가 높으면 중립적인 정찰벌도 지지자로 흡수된다. 놀랍게도 이 다채로운 의견들은 결국엔 ‘최적’ 집터로, 그것도 만장일치로 수렴된다. 제임스 뷰캐넌이 그토록 갈망하던 만장일치를 꿀벌 사회가 이루어낸다면 모든 민주주의 이론은 꿀벌에 당연히 주목해야 하지 않겠는가. 꿀벌은 어떻게 이를 이루어내는가?
히틀러 치하를 산 위대한 동물학자로 노벨상을 받은 ‘카를 폰 프리슈’ 및 그의 제자 ‘마르틴 린다우어’의 꿀벌의 과학을 이어받은 미국인 저자는 이 만장일치의 합의 도출 과정을 흥미로운 자연 실험으로 추적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동물행동학 책이겠지만 저자는 이 과정을 인간 집단의 민주주의 의사결정에 주는 함의까지 도출하는 흥미롭고 설득력있는 사회생물학의 수작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최종적 최적 대안으로 좁히기 위해 열등한 다른 대안들을 내세운 꿀벌의 의견들은 어떻게 ‘소거’될까? 벌은 이전에 자신이 주장하던 열등한 대안과 다른 벌이 광고하는 더 나은 대안을 비교 후 이제 후자로 지지를 바꾸는 것(비교-전환 가설)이 아니다. 오히려 열등한 자신의 대안을 주장할 동기를 상실하고 그저 조용히 있는다(은퇴-휴식 가설)고 규명된다. 인간의 민주주의에서는 자신의 대안보다 나은 다른 대안을 본 후에야 의식적으로, 대개는 마지못해, 패배하고 밀려난다. 꿀벌은 자신의 열등한 의견을 스스로 양보하고 철회한다. 비유하자면, 인간 사회에서 승자는 패자를 죽이거나 격파하고 승리를 얻지만 꿀벌의 세계에서는 패자가 스스로 사라져버림으로써 승리가 나온다. 막스 플랑크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를 설득하거나 그들이 그 빛을 보도록 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죽은 뒤 새로운 세대가 그 빛에 친숙해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을 가진 백성들이 다 죽은 후에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마지막 장은 꿀벌이 민주주의에 주는 함의를 제시한 결론이지만 논증의 과학적 정교함은 많이 손상되었다. 꿀벌의 의사결정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하는 것과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이다. 저자의 제안이 민주사회에 다 적실하지는 않은 듯하다. 거기서는 정책결정 참여자를 공익 의식을 갖춘 자만으로 구성하는 강제를 행사하기 어려우며, 정부의 의사결정에 ‘리더’의 역할은 오히려 필요하며, 충분한 논의로 집단 지식을 종합하는 건 시간, 정보 및 분석 능력의 부재로 무결정(non-decision making)을 초래한다.
실제 민주적 결정들은 다양한 대안이 아니라 기존 대안을 약간 증감한 범주에서 주로 선택되며, 꿀벌의 만장일치 합의를 닮으라고 요구하면서도 결국 과반수 규칙 등의 공식적 표결 절차를 적용하라 제안함은 모순이다.
가장 근본적 문제는 민주주의에 교훈을 주려는 꿀벌 사회 자체가 결코 민주사회가 아니라는 점. 여왕벌이 독재자가 아닌 것은 그녀가 민주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리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일 뿐이고 그 사회는 개체들이 부품으로 간주되는 철저한 계획체제인데, 거기로부터 구성원의 이익이 중요한 민주주의에 유효한 함의를 도출함이 타당할까? 저자는 인류의 반만년 동반자 꿀벌이 보여주는 효율성이 우리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정교함을 잘 논증해 주었다. 동시에, 호모 사피엔스 종이 고안해 낸 민주주의는 꿀벌의 과학으로 보충하기에는 훨씬 더 까다로움도 저자는 의도하지 않게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는 달콤하기보다 씁쓸하다. 인간은 꿀벌보다 더 난해한 종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