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자유를 향한 긴 여정
“자유에는 민주주의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 자유 속에서 살고 싶다면 안으로든 밖으로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 힘을 합치고 참여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 혼자만을 위한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자유란 우리 모두의 것이다.” - 739쪽
이 책은 35년간 동독 공산 치하에서 살았던 물리학 전공의 동독 출신이자 최초의 여성, 최연소로 독일 총리직에 올라 장장 16년간 재직했던 기적의 여인 앙겔라 메르켈의 회고록이다.
메르켈은 이 책에서 그녀의 동독 시절, 격동의 통일 정국, 그리고 총리직에 오른 후 그 임기 동안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몇 번의 역사적 위기들, 즉 2008년의 금융위기, 2010년의 유로위기, 2015년의 난민사태, 그리고 2019년의 코로나 팬데믹에 온몸으로 맞서던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비교적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진지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격정보다는 이성이 앞서는 가운데, 책 전편에서 뛰어난 위기 관리자로서 그녀의 모습이 부각된다.
이 책의 전편을 관통하는 기본적 사상적 가치는 책 주제인 ‘자유’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생애의 고비마다 ‘자유’의 의미를 되묻고 그 실현 의지를 다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란 무엇인가”는 그녀의 평생 질문이었다. 메르켈은 총리 취임 후 첫 연설문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은 자유였습니다”라고 술회하고, “더 많은 자유에 도전합시다!”라고 자유를 향한 자신의 강렬한 정치적 의지를 피력했다(348쪽).
그렇다면 메르켈에게 자유는 어떤 개념인가? 홉스(T. Hobbes)에 따르면, 자유란 ‘사슬과 감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 고전적 자유 개념은 자유를 가장 협의로 규정한 것으로, 바로 그녀가 동독 시절 절절히 갈망했던 소극적 의미의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이다. 그러나 그녀가 정치에 입문한 후, 특히 총리 재임 후 늘 추구했던 자유는 ‘…을 할 자유(freedom to)’로 그 성취를 위해 필요할 때 국가가 앞장서서 나설 것이 기대되는 적극적 자유의 개념이었다. 그녀는 베를린의 자유의 종*을 자주 언급하며 ‘자유와 책임’(제3부 주제)을 강조하고, “자유에는 용기와 진정성이 필요하다”(738쪽)고 외치며 “나는 시민 개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고 필요할 때면 강력한 국가가 나서서 시민을 돕는 기민당을 원합니다.”(295쪽)라고 적극적 자유 개념을 명료하게 밝혔다.
메르켈 리더십의 특징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의 논의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외면하고 ‘진영화(陣營化)’의 여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참담한 한국의 현실 정치에 대한 교훈과 처방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선 그녀는 이념이나 비전을 내세우지 않고 실용주의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며, 가급적 대결적 상황을 피한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리더십에는 개인적 권위를 앞세우거나 남성성(男性性)이 부각되는 힘과 위력, 위협과 공격성, 오만과 으스댐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이성과 협력, 과학적 접근과 네트워킹, 그리고 따스한 ‘모성(母性) 리더십(Mutti leadership)’이 두드러진다. 그녀가 자주 쓰는 전략은 반대파와의 첨예한 갈등의 원인이 되는 뇌관, 즉 ‘정치적 요소’를 제거하고, 주제를 전문성과 사실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과학자 출신인 그녀 특유의 정치 접근이다.
메르켈의 정치적 장수 비결은 국민의 마음을 읽는 데 능하고, 학습 능력과 적응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치무대를 떠난 후에도 독일 국민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데는 그녀가 지닌 또 다른 측면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것은 그녀의 실용주의적 리더십 심층에 자리하고 있는 심오한 도덕성과 인류애가 아닐까 한다. 그 대표적 예가 2015년 9월, 메르켈의 난민 입국 허용이었다. 이 세기적 결단은 거센 여론의 반발과 극우 대안당(AfD)의 연방하원 입성 등 주체하기 어려운 후폭풍을 불러왔으나, ‘모두의 자유’를 추구하는 그녀의 정치적 리더십의 참다운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메르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속한 기민당(CDU)/기사연(CSU)의 이념적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민당/기사연은 전통적 보수 가치와 시장경제를 표방하지만, 다른 한편 사회정의와 형평을 중시하는 친(親) 복지국가 정당이다. 따라서 미국의 공화당이나 영국의 보수당과는 확연히 다른 개혁적 보수정당이다. 그 때문에 적수인 사민당(SPD)과의 이념적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깝고, 그 때문에 양당 간의 정치적 협상과 합의가 그리 지난(至難)하지 않다. 독일 정치가 오랫동안 중도정치의 근간을 지키며, 진영화의 여울에 빠지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 자유의 종(Freiheitsglocke)은 1950년 미국 시민들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유의 상징물로 베를린시에 선물한 종(鐘)으로 미국의 자유의 종(Liberty Bell)에서 영감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