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한번 넘긴 지도는 돌아오지 않는다! : 공간 데이터 주권과 플랫폼 종속을 묻다
“소버린 AI는 기술 개발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도와 공간정보, 법과 표준, 책임 구조까지 함께 설계해야 하는 문제다.” - 204쪽
30여 년간 국가 공간정보 인프라 구축 현장을 누벼온 저자는 기술자이자 경영자이며, 최근에는 법학까지 공부한 복합 역량의 실무가다. 국민 생활과 맞닿은 공간정보 인프라를 직접 구축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은 단순한 기술 해설에 머물지 않는다. 공간정보가 기술의 문제를 넘어 제도·책임·안보의 문제로 작동하는 현실을 현장에서 직접 마주해 온 저자만이 제기할 수 있는 질문, 즉 "인공지능 시대에 고정밀 공간 데이터는 누구의 손에 있어야 하는가?"에 답하기 위해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책은 먼저 고정밀 디지털 지도를 단순한 위치 정보가 아니라 AI가 현실 세계를 학습하는 공간지능의 핵심 자산으로 재정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전쟁·무역·영토를 둘러싼 패권 경쟁이 총과 관세에서 좌표와 데이터로 이동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하늘·바다·땅·우주를 아우르는 국가 공간정보 인프라가 있다. 특히 "한번 넘긴 데이터는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데이터 비가역성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의식이다. 국외로 반출된 공간 데이터는 인공지능 학습의 자료로 활용될 수 있고, 그렇게 학습된 AI 모델은 이후 어떤 공간적 판단을 내리게 되는지조차 추적하거나 수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고정밀 지도의 역외 반출이 단순한 행정 결정이 아닌 비가역적 주권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더욱이 데이터가 한번 국경을 넘으면 그 종속은 단순히 데이터의 소실에 그치지 않는다. 플랫폼이라는 구조 안에서 종속은 더욱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심화하기 때문이다. 책은 구글을 검색·광고·모바일·지도·앱 스토어를 하나로 엮은 플랫폼 권력의 실체로서 바라보고, 포켓몬 GO에서 TV 광고에 이르는 대중문화·광고를 활용한 플랫폼 침투 전략을 통해 종속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한국이 세계에 앞서 구축한 전국 1:5,000 디지털 지도 생태계가 오히려 플랫폼 종속의 토양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2007년부터 이어진 구글 지도 반출 논쟁의 역사를 되짚는다. 나아가 상업 지도가 실제 전쟁의 무기로 전용된 사례를 한반도 안보 현실과 연결하면서, 서버 위치나 독도 표기 논쟁을 넘어
"공간 데이터가 어떻게 축적되고 이동하며, AI 학습을 통해 어떤 판단 구조로 고착되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처럼 데이터 비가역성과 플랫폼 종속 문제는 우리나라만이 직면한 과제가 아니다. 세계 주요국이 각자의 전략으로 공간 데이터 주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저자는 주요국의 공간정보 정책을 네 가지 패러다임으로 비교한다. 미국은 연방정부 생산 데이터를 공공재로 개방하면서도 안보와 직결되는 지점에는 정책과 법에 기반한 분명한 필터링을 유지하고, 유럽연합은 데이터 개방과 개인정보 보호를 동시에 추구하며 디지털 주권을 확보한다. 일본은 무엇을 어디까지 공개할지를 정해진 절차로 판단하는 허가제를 운용하며 공간정보를 신중하게 관리하고, 중국은 공간 데이터를 처음부터 국가가 통제하고 필요한 만큼만 개방하되 외국 기업에는 서버 위치와 데이터 처리 방식까지 엄격한 조건을 부과한다. 접근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자국의 전략적 판단 아래 공간정보를 관리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나름의 제도적 기반 위에서 대응해 왔으나, ‘반출 불허’라는 소극적 방어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비교는 앞으로 어떤 원칙과 철학 위에서 공간정보 정책을 능동적으로 재설계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소극적 방어를 넘어 ‘능동적 대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도적 전환이 필요하다. 기술과 데이터의 문제는 시장에 맡겨둘 수 없으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은 결국 ‘제도’ 뿐이다. 이 책에서 제기한 질문이 입법과 정책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정밀 디지털 지도의 역외 반출이 ‘조건부’로 허용된 지금, 데이터 주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데이터 주권의 확보는 단순히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내 산업이 공간 데이터의 생산·유통·활용 구조를 주도적으로 통제함으로써 플랫폼 종속을 억제하고 국내 공간정보 산업의 경쟁력을 지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공간정보와 관련한 법과 제도의 재검토에서부터 국가 차원의 공간지능 역량 확보, 데이터 활용에 따른 권리와 책임의 명확화에 이르기까지, 입법 과제는 폭넓고 긴요하다. AI 시대의 국경이 데이터로 그려진다면, 그 국경을 수호하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제도와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