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자
서병훈(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미국 라이스대학교 정치학 박사)
서평
한국 민주주의에 비상등을 켜라
“정치에서도 정당들이 무엇은 바꾸고 무엇은 지켜야 한다는 분명한 판단 아래 질서와 진보를 모두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인 그릇이 커질 때까지는, 질서 또는 안정을 추구하는 정당과 진보나 개혁을 주장하는 정당 둘 다 있는 것이 건전한 정치적 삶을 위해 중요하다는 생각이 거의 상식이 되다시피 한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인식 틀은 각기 상대방이 지닌 한계 때문에 존재 이유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상대편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 이성과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p. 372)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그냥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밀은 여성과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운 ‘진보적 자유주의자’요, 폐쇄적 민족주의를 질타하며 보편적 인류애를 추구한 열린 지식인이었다. 그는 또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에 강렬한 관심”을 가졌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젊어서부터 ‘철학적 급진주의’ 개혁 운동의 선봉이었고 말년에는 의사당에 들어가 ‘진보적 자유주의’의 구현에 온 힘을 쏟았다. 따라서 그의 글에는 시대의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답이 들어 있다. 1991년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 출판부는 총 33권의 《존 스튜어트 밀 전집》을 완간했다. 이 전집의 목차만 훑어봐도 밀이 얼마나 위대한 저술가인지 알 수 있다. 《선집》은 이 중에서 밀 사상의 정수라고 할 《공리주의》, 《자유론》 등 6권을 담았다.
밀은 공리주의자답게 효용(utility)을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기준으로 삼았다. 무엇이 효용인가? 그는 물질적인 쾌락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발전(self-development)’이 최고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 삶에서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최대한 가깝게 각자를 끌어올리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하거나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확언했다. 따라서 밀의 생각과 포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리주의》부터 읽는 것이 좋다. 오늘날 ‘진실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이 없는 삶은 무기물이나 다름없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우리가 이 순간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밀은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한편, 남을 돕고 배려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역설한다. 행복을 원하는가. 《공리주의》에 그 답이 있다.
밀의 《종교론》은 공리주의 도덕률을 종교의 경지로 승화한 것이다. 그는 논리적 기초가 부족하더라도 종교는 여전히 유용하다고 하면서 ‘인간종교’를 제창한다. 참된 행복을 향한 밀의 지적 탐구는 《여성의 종속》에서도 이어진다. 밀은 남녀차별이라는 ‘불의의 극치’에 분노하며 여성의 정신적・사회적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이론적・도덕적 당위를 뜨겁게 주장한다. 이 책은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남성의 삶에도 치명적인 해독을 끼친다는 사실을 가슴 서늘하게 경고한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주의론》도 의미가 크다. 밀은 자본주의 체제의 효율성을 살리면서 일하는 사람이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미래를 꿈꾸었다. 단, 그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우선이다. 생산자협동조합에 바탕을 둔 ‘자유사회주의’가 그의 답이다.
《존 스튜어트 밀 선집》의 백미는 역시 《자유론》이다. 밀 자신도 《자유론》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멋대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나무는 땅속 깊은 곳으로 자유롭게 뿌리를 뻗는다. 그러나 그 자유는 물과 양분, 즉 생명의 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방향이 전제된 자유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사회는 반(反) 자유적이다. 생명을 희롱하니 행복할 수가 없다. 진실을 능욕하니 진영논리가 세상을 뒤엎을 수밖에 없다. 밀은 진실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자유론》은 ‘다면성’(many-sidedness)에서 시작해서 ‘다면성’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쪽저쪽 두루 살피고, 듣기 싫은 말도 자청해서 들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대의정부론》은 《자유론》의 후속편과도 같다. 밀은 대의민주주의만이 참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열고, 계급 이익의 굴레를 벗어버리면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사악한 이익’ 앞에서 이성이 빛을 잃고 있다. 민주주의의 탈을 쓴 다수 독재가 일상화되고 있다. 밀은 이에 맞서 숙련(skilled) 민주주의를 제창한다. 참여의 확대와 교육의 혁신을 통해 대중의 지적・도덕적 수준이 향상되길 고대한다. 민주주의의 실체적 진실에 분노하는가. 《대의정부론》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선집》을 곰곰이 읽다 보면 자꾸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마치 밀이 2020년대 한국의 지식인들을 향해 이 책을 준비한 것 같다. 그만큼 밀의 《선집》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경구(警句)로 가득하다. 밀은 확증편향과 ‘정치적 부족주의’와 진영논리는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암세포나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온 시민이 합심해서 당파적 선동꾼들을 몰아낼 것을 촉구한다. 그러자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밀은 허심탄회한 토론이 민주주의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을 절규하듯이 강조한다. 독단과 편견이 범람하는 시대, 우리가 밀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